[책] <파과> 독서 후기
📚 책소개
한국 소설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질 새로운 여성 서사를 탄생시킨 구병모 작가의 《파과》가 새 옷을 갈아입었다.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조각은 새삼스레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게 된다.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는 모든 것,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조각의 마음 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오래된 숙제처럼 마음에 품고 있던 책이다. 이번에 드디어 영화화 소식을 접한 것을 계기로 읽어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간단하게 독서 후기를 작성해보겠다.
구병모 작가님의 장편소설 〈파과〉는 살인 청부업(방역이라고도 불린다)을 일생의 업으로 삼아온 한 노년 여성, 조각爪角의 서사가 담겨진 책이다. '파과'는 냉장고 안에서 물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 덩어리, 언젠가는 먹음직스럽게 여물었던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에서 비롯되었다. 파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짓무른 복숭아처럼 흠집이 난 과일 외에 16세 여자를 뜻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작중 연령은 65세.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흔히 이 연령대의 성인을 아울러 노년층으로 구분하고 복지 혜택을 지원하고 있다. 노후를 위한 준비를 끝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어쩌면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또는 누군가에게는 해방감으로 여겨질 상실감을 경험하게 될 나이라고 여겨진다. 줄거리의 배경은 그녀가 방역업이라는 비밀스러운 업계에 발을 들인 이후로 40년이 지난 시점이다.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을 거쳐 류라는 남자를 만났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모든 것을 잃고 홀로서기 시작한 이후에는 '손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손톱 밑에는 많인 것이 감춰져있다. 그녀에게 붙은 가명인 '조각'은 짐승의 발톱과 뿔을 지칭하며,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손톱은 날카롭게 벼리면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다듬고 치장하면 여성성의 상징이 된다. 날카롭고 깔끔한 그녀의 일처리 능력과 여성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중의적으로 담겨있는 듯 하다. 이따금 자신을 향해 '어머니'라 지칭하는 이들을 바로 잡는 등, 그녀는 사회에서 노년 여성을 바라보는 편향적인 시선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곤 하는데, 사회적 약자를 향한 편견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능동적 행위임과 동시에 특수한 그녀의 직업 윤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버려진 개에게 느끼는 연민. 강박사에 대한 감정. 의뢰인의 눈동자에 담긴 공허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2, 30대 만큼 민첩하게 대룰 수 없는 신체의 변화로 인해 마음의 변화가 동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킬 것은 만들지 않겠다던 지난 날의 다짐이 어떤 계기로 하여금 으스러진다. 감정의 자물쇠가 세월에 부식되어 허물어진 것이다. 앞서 걸을 때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뒤쳐져 걷는 순간 보일 때가 있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사라지기 위해 점점 노쇠해지는, 혀에 닿으면 달콤한 맛을 내며 분명한 쓸모가 있었을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처럼. 어쩌면 영원하지 않을 순간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투우는 그녀가 느낀 심경의 변화를 더욱 확실히 자각하도록 돕는 역할이 되었다고 본다. 투우는 과거의 일에 대한 복수심이나, (서른 세살이나 된 이 남자가)치기어린 마음이었다 한 들, 이해하기 힘든 충동적인 행동으로 그녀의 일에 훼방을 놓는다. 그 과정에서 조각에게 거미줄같이 연약했던 관계는 거미줄에 걸린 작은 곤충처럼 단단히 엉겨버린다. 투우의 시각에서 이해해보자면 두 사람의 이별은 강렬했고, 그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다소 의문스러웠지만, 잘나가는 방역업자가 되기까지 그녀가 어린 투우의 삶에 끼어들었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방역 작업 중에 잦은 실수를 범하고, 감정을 피우고, 연민을 느끼는 그녀의 변화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이란, 아마도 배신감과 같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심술로 위장한 원망을 그녀의 그림자를 밟는 데에 다 쏟아부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인공인 그녀가 다년간 살인을 업으로 일삼은 청부업자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를 생각하면 다소 긍정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던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언젠가 사라질지 모를 다섯 손톱 위에 남은 매니큐어 뿐이다.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간 상실을 쥔 채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사라지기 위해 살아진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에야 알 수 있다. 과일이 뭉크러진 것, 해가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안다. 공기처럼 필연적인 지금 이 순간은 때가 묻고 풍파에 쓸리고 발가벗겨진채 부끄럽게 흘러가지만, 언젠가는 찬란한 지점과 맞닿는 순간이 온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에 무엇을 빛내고 떠날 수 있을까.
- 저자
- 구병모
- 출판
- 위즈덤하우스
- 출판일
-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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