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나 이제 고수 짱 잘먹는 고수임.
고수에 대한 글을 쓰려고 열었는데,
트위터처럼 쓰게 되네.
고수를 처음 접해본 것은 2015년 8월, 베트남으로 출장을 갔을 때다. 3박 4일로 홍보 영상 촬영 차 다녀오게 되었다. 내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첫 해외 방문이다. 처음으로 만들었던 여권은 올해로 벌써 10년이 되어 만료를 앞두고 있다. 사실 너무너무 떠나기 싫은 출장이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 동행했던 직원들이 나보다 10살 이상 많은 기혼남 세분 뿐이었던 것도 그렇고, 하필 당일에 터져버린 대자연의 힘으로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든 상태에다가, 회사에 대한 불만도 많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여행이 아닌 일을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게 된 것도 마음의 심란함을 더했다. 3박 4일동안 호텔방 안에만 틀어박혀있을 내 모습이 미리 그려졌다. 아저씨들이야 아저씨들끼리 놀면 재밌겠지. 나는 베트남에 대한 감상과 고통을 함께 떠들어제낄 동료도 없고. 베트남에 온 한국사람 중에 나만큼 우울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들은 일정 중 밤늦게 클럽에 다녀오셨다. 같이 가자는 권유를 완강히 거부한 나는 일과 식사가 끝나면 줄곧 호텔방에 머물렀다. 호텔 인근 마트에 다녀온게 내 일탈의 전부. 무더운 것을 기본값으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돌변하는 날씨에, 야외에서 장비들을 들고 뛰어다녀 기력도 없는데, 생리통까지 겹쳐 짜증이 있는데로 솟구쳤다. 그렇게 힘든 일과를 끝내고 먹은 저녁 메뉴가 하필 똠양꿍이었다.
세상에. 이토록 거북한 음식이 있다니.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경악스러움이었다. 똠양꿍 안에 들어있던 고수가 한 몫 거들었다. 흔히들 표현하는데로 먹어본 적 없는 화장품 맛이 났다. 현지의 고수향은 어쩐지 더욱 짙었다. 내가 고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자 아저씨들은 쌀국수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첫 만남에 곧바로 이별을 선언하고 그 이후로는 애써 고수가 없는 음식을 찾아 먹었다. 또 어떤 음식을 먹었더라. 흠. 사실 쌀국수 외에는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3박 4일이 지나갔다.
최근까지도 고수를 보면 그 당시의 향과 맛이 났다. 고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작년 말 부터다. 거창한 계기는 없다. 점심시간 우연히 쌀국수집에 갔고, 그 때 우연히 육수에 절여먹은 고수가 쌀국수의 풍미를 더해주었을 뿐. 다른 계기는 전혀 없다. 이상하다. 요즘의 나는 입맛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정확히는 차분하게 하나씩 변해간다. 과거에 나를 사로잡았던 맛을 잃고 새로운 맛을 얻었다. 물론 즐겨먹던 음식은 지금도 변함없이 잘 먹는다. 바깥 세상에서 자란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잎이 겨우 돋아난 작은 새싹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까. 세월과 함께 얻게되는 변화가 신기하고 새삼스럽다. 나는 여전히 못 먹는 음식들이 많다. 앞으로 또 어떤 맛을 얻게 될지에 대한 기대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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